phrase/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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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우 / 드라이플라워
백야 속에서 네가 반쯤 웃고 있었다 매혹적인 이미지 외설적인 향기 몽환적인 목소리 너의 모든 것을 훔치고 싶은 한순간이 있었다 아주 잠깐 너를 꽉 안아주었다 그것은 치사량의 사랑이었다 나는 네가 아름다운 채 살아 있길 바란 적은 없었으나 아름다웠던 채 죽기를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조혜은 / 장마―휴일
밤이 깊으면 비어 있는 벤치가 없어. 나와 너는 걷고 또 걸었지. 밤이 깊어도 쉴 수가 없어. 너는 나에게 헐벗은 꿈을 맡긴 채, 어느 먼 곳에서. 나는 나에게 아이의 헐벗은 숨을 맡긴 채, 또 어느 먼 곳에서. 휴일이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언제 일하고 어떻게 쉴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오래된 양주 가게와 빛바랜 양장점을 지나 어느 낯설고도 낯익은 가난한 골목들을 손에 걸고 걷고 또 걸었었는데, 이제 이 모든 건 오래된 휴일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한 가닥도 숨기지 못하던 너는, 이제 내게 몸이 담긴 사진을 보내달라고 말하지. 너는 그곳에서 뭇 사내들이 낯익고도 낯선 여자들의 몸을 더듬어 파괴하는 것을 지켜본다고. 너는 사라진 휴일처럼 두렵고 상처 난 영혼을 더듬으며. 하루는 나와 아이의 이름을 손바닥에..
허연 / 무념무상 2
잔해를 남긴 것에 대해 후회한다. 녹물 흘러내리고 있는 오래된 도시의 교각 밑을 걸으며, 버려진 채 주저앉은 폐차 옆을 지나며 저것들도 누군가의 후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제비집을 허물고 아버지에게 쫓겨나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감당할 수 없이 두렵고 외로웠으며, 바닥에 내팽겨쳐진 빨간 제비 새끼들의 절규가 마른 봄을 관통하던 그런 밤이었다. 그날 나는 신부(神父)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때 처음 '뼈아프다'는 말을 이해했고, 철든 시절까지 난 괴로웠다. 절대로 묻히거나 잊히지 않는 일은 존재했다.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잔해를 남겼다. 후회한다. 돌아가고 싶다. 내가 짓고 내가 허물었던 것들에게.
허연 /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 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성동혁 / 여름 정원
누가 내 꿈을 훼손했는지 하얀 붕대를 풀며 날아가는 새 떼, 물을 마실 때마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자의 명치를 밟고 함께 주저앉는 일 함께 멸망하고픈 것들 그녀가 나무를 심으러 나갔다 나무가 되어 있다 가지 굵은 바람이 후드득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아이들을 흔든다 푸르게 떨어지는 아이들 정적이 무성한 여름 정원, 머무른다고 착각할 법한 지름, 계절들이 간략해진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정원에 있다 슬프고 기쁜 걸 청각이 결정하는 일이라니 차라리 눈을 감고도 슬플 수 있는 이유다 정원에 고이 잠든 꿈을 누가 훼손했는지 알 수 없다 눈이 마주친 가을이 담을 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걸쳐있다 구름이 굵어지는 소리 당신이 땅을 훑고 가는 소리 우리는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
허연 /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